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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후 난 내 덩치가 또래에 비해서 상당히 크다는 걸 알았다. 아마 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난 꽤 유순했던 것 같다. 누구와 쌈박질을 하거나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경우가 거의 없었다.
3학년이 되어 입학이 늦어 덩치가 제일 크고 성격 사나운 옆 동네 친구가 같은 반에 들어 왔다. 입학한 지 얼마 안 가 녀석은 반에서 소위 '짱'이 되어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함부로 대적하려는 친구가 없었는데도 녀석은 종종 다른 친구들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나만 빼고.
지금 생각하면 녀석이 나를 어려워한 이유는 바로 옆 동네에 살았다는 것과 몇 번 해 본 팔씨름 결과에 더해 학교 성적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녀석은 3학년이 되도록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녀석을 피하고 나와 친하게 지냈다. 우습게도 녀석은 그런 현실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종종 내게 집에서 기르는 과일이나 먹거리들을 가져다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녀석에게 결과적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일을 본의 아니게 저지르고 말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 어떤 인쇄물을 나누어주고는 보호자의 자필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문제는 녀석의 부모님 역시 한글을 모른다는 데 있었다. 결국 녀석은 자기 책보따리에 넣었다가 그대로 가져와서는 나에게 아버지 이름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아버지 함자를 동네 어른들이 부르는 '주엑이' 혹은 '줴기'라는 음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글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녀석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어림짐작으로 '정주억'이라고 썼다. 불행히도 후에 알게 된 성함은 '정규혁'이었다. 결과는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의 불호령으로 녀석은 서너 시간이나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아울러 어린 가슴에 상처가 되는 심한 말까지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이 그리도 괘씸한 소행이었는지 의문스럽다.
녀석은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눈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녀석은 결국 고향을 뜨고 말았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버렸다는 소문이 돈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후로 난 녀석의 고향집 근처에는 되도록이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만 할 때에는 혹시 가족 중 누군가가 볼 세라 잽싸게 지나치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내가 군을 제대하던 해의 추석에 녀석은 너무나 말쑥해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고 우린 술집에 앉아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호쾌한 웃음과 함께 쏟아내었다. 학력 때문에 군대조차 면제된 그는 이미 고향마을에서 부러움을 사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의 아픔이야 말해 무엇하랴.
나는 내 오랜 짐을 덜어준 그가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추석이 가까워오면 유독 그 기억이 새롭다.
3학년이 되어 입학이 늦어 덩치가 제일 크고 성격 사나운 옆 동네 친구가 같은 반에 들어 왔다. 입학한 지 얼마 안 가 녀석은 반에서 소위 '짱'이 되어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함부로 대적하려는 친구가 없었는데도 녀석은 종종 다른 친구들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나만 빼고.
지금 생각하면 녀석이 나를 어려워한 이유는 바로 옆 동네에 살았다는 것과 몇 번 해 본 팔씨름 결과에 더해 학교 성적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녀석은 3학년이 되도록 한글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녀석을 피하고 나와 친하게 지냈다. 우습게도 녀석은 그런 현실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는 듯했다. 게다가 종종 내게 집에서 기르는 과일이나 먹거리들을 가져다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녀석에게 결과적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일을 본의 아니게 저지르고 말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 어떤 인쇄물을 나누어주고는 보호자의 자필서명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문제는 녀석의 부모님 역시 한글을 모른다는 데 있었다. 결국 녀석은 자기 책보따리에 넣었다가 그대로 가져와서는 나에게 아버지 이름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나는 녀석의 아버지 함자를 동네 어른들이 부르는 '주엑이' 혹은 '줴기'라는 음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글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녀석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워, 어림짐작으로 '정주억'이라고 썼다. 불행히도 후에 알게 된 성함은 '정규혁'이었다. 결과는 사정을 모르는 선생님의 불호령으로 녀석은 서너 시간이나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아울러 어린 가슴에 상처가 되는 심한 말까지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이 그리도 괘씸한 소행이었는지 의문스럽다.
녀석은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눈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에 녀석은 결국 고향을 뜨고 말았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버렸다는 소문이 돈 건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후로 난 녀석의 고향집 근처에는 되도록이면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만 할 때에는 혹시 가족 중 누군가가 볼 세라 잽싸게 지나치곤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내가 군을 제대하던 해의 추석에 녀석은 너무나 말쑥해진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고 우린 술집에 앉아 오랜 시간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호쾌한 웃음과 함께 쏟아내었다. 학력 때문에 군대조차 면제된 그는 이미 고향마을에서 부러움을 사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의 아픔이야 말해 무엇하랴.
나는 내 오랜 짐을 덜어준 그가 지금도 너무나 고맙다. 추석이 가까워오면 유독 그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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