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내가 90년대 초에 읽었던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닥터 노먼 베쑨> 입니다. 그는 캐나다 출신의 흉부외과 의사였으며 중국 '대장정'에 참여했던 혁명가였습니다. 그가 주장했던 사회주의 의료 개념의 골자를 다음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료보호혜택이 소득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만인에게 베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선이 아닌 정의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선이란 기부자들을 자기 기만에 빠지도록 함과 동시에 수혜자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자선이란 기부자들을 자기 기만에 빠지도록 함과 동시에 수혜자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은 단지 의료제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반에 두루 적용되는 말일 것입니다.
아침에 지하철에서 읽던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중 진은영 작가의 글에서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말한 글귀가 내내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 그리고 이 사회를 우울에 빠뜨렸던 수 많은 사건들을 앞에 두고 억지로 지어내는 몇 방울 눈물에 막중한 책임의 굴레를 벗겨 주는 면죄부를 남발해 왔고, 나는, 우리는 역시 서 푼 어치도 안 되는 값싼 동정과 연민으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수치심으로부터 탈출해 왔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우리 모두를 또다시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이끌고 말 것입니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작은 불편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나약함과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2014년 10월 16일에 올렸던 글, 이 글 올린 그 날 저녁,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 위에 언급한 <짜라투스트라>와 <진은영> 작가의 글이 소개됐던 것을 보며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었음)
반응형

'역사,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실과 진실]  (1) 2023.08.30
4.3  (0) 2011.04.04
노블레스 오블리주  (0) 2010.11.26
49재, 2009. 7. 10. 봉하  (0) 2009.07.11
울고 또 울다.  (0) 2009.05.26
반응형



<사실(事實)>은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로 흔히 영어 'fact'와 유의어로 봅니다. 그리고 <진실(眞實)>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이라고 하며, 영어로는 'truth'에 가깝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개념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고, 또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론이나 사람들의 여론과 관련되면 상당히 복잡한 문제로 확장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또 그와 관련한 사태에 대해서도 대부분 알고 계실 것입니다. 

1993년 젊은 사진 작가 케빈 카터는, 우리에게는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속 성자 이태석 신부가 활동했던 수단의 한 지역에서 굶주림으로 뼈대만 앙상한 한 아이와 그를 바라보는 독수리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는 심각한 기아 상황과 전염병으로 통제된 아요드 지역의 참상을 보도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고, 그 후 이 사진은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고, 관련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퓰리처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서른 네 살의 젊은 그는 이 상을 받은 석 달 후 자동차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가 이 사진을 보도했을 때, 기아의 참상을 알린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진 기자라는 칭송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린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부터 찍었다"는 등의 거친 비난을 받았습니다. 

케빈 카터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당시 그의 경제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고, 또 친한 동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하기에 그런 비난들이 그의 자살에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많은 이들의 비난은 이 사진만 봤고, 그에 얽힌 좀 더 긴 이야기들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 사진은 소녀의 어머니가 딸을 병원에 데려가다가 잠시 내려놓았고, 그 찰나에 독수리가 앉았으며, 그리고 지나가던 케빈 카터가 그 장면을 발견해 사진을 찍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 직후 그는 독수리를 쫓았고, 엄마는 다시 아이를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 사진을 보고 비난을 쏟아냈던 사람들이 전후 맥락을 잘 알고 있었을까요? 사진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었겠죠. 

비난은 한 호흡 쉬었다 해도 늦지 않습니다. 

반응형

'역사,사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민, 동정 그리고 자선에 관하여  (1) 2023.10.19
4.3  (0) 2011.04.04
노블레스 오블리주  (0) 2010.11.26
49재, 2009. 7. 10. 봉하  (0) 2009.07.11
울고 또 울다.  (0) 2009.05.26
반응형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2016)]
연휴 나흘 내내 공원을 돌며 토끼하고만 놀고 싶은 마음 한 귀퉁이를 살짝 접어 놓고, 마지막 날 잠시 시간을 내어 영화를 봤다. 아주 인상 깊게 봤던 영화 본 시리즈의 주인공인 맷 데이먼이 제작자이고, 감독은 많이 들어 본 느낌이지만 처음인 케네스 로너건, 주인공 '리'는 케이시 애플렉이라는 역시 많이 낯익은 듯하면서도 기억에 없는 배우이다.
영화는 시종 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운 듯한 분위기로, '죽음'과 '일상의 슬픔'을 다루지만 그런 감정들을 직접적이지 않고, 매우 세련되게 그린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이게 말이 되나? 어쨌든) 그러다 보니 끝을 끝이라 알릴 필요도 없다. 그저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영화는 끝나 있다. 굳이 감정을 추스릴 필요도 없다.
자막이 모두 올라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려한 볼거리도 없었고, 진한 슬픔을 맛 본 후의 카타르시스도 없었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낄 만한 달콤하고 쾌적한 장면도 없었다. 하지만 군불 땐 아랫목의 따스함이 엉덩이로부터 시나브로 척추를 거쳐 온 몸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반응형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강식품 Top 20  (0) 2012.07.09
김민기, 김광석 그리고 작별...  (0) 2009.05.28
난 데 없는 뻐꾸기 이야기  (0) 2007.10.22
비 오는 아침의 어떤 '그리움'  (0) 2007.09.07
더운 날의 생각들...  (0) 2007.08.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