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녈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었다가
하로 아침 비바람에 속절 없이 떨어지는 그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같이 붉게 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와 같이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모진 비바람 만나 흩어지는 가엾은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 것이외다
- 박팔양, 봄의 선구자 진달래를 노래함 中 -
내 기억 속의 봄 산은 진달래 산이었다. 이른 봄이 오면 형과 누나가 학교에 가고 난 후, 강아지를 발 뒤꿈치에 달고 걷던 뒷산 오솔길도, 야트막한 야산 산마루에 올라 바라보던 산줄기 양지 언덕에도 분홍빛 진달래가 수놓고 있었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한 잎 두 잎 따 먹은 진달래에 취하여
쑥바구니 옆에 낀 채 곧잘 잠들던
순이의 소식도 이제는 먼데
예외처럼 서울 갔다 돌아온 사나이는
조을리는 오월의 언덕에 누워
안타까운 진달래만 씹는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 조연현, 진달래 -
4.19를 한 주 앞 둔 지난 주말 강화 혈구산을 찾았다. 고비고개를 지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고려산은 인파로 북적이지만, 혈구산은 한적하기만 하다.
혈구산(穴口山)은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불은면, 내가면에 위치하며 해발 436m 이다. 이 산은 혈굴산, 설구산 또는 열구산 이라고도 하던 산으로 강화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상고시대에는 강화 옛땅이름의 상징 이였으며 혈구군의 주산으로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지로 상고시대에는 삼신수혈사상의 요람지로 '굼산' 또는 '감산'이라 하여 신성시하였으며 주민으로부터 숭앙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제3봉에서 혈구산 정상에 이르는 능선의 왼편으로는 진달래가 군락을 이루어 이맘 때면 분홍빛 장관을 연출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은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 이영도, 진달래 -
7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는 4.19 학생혁명을 추모하며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내가 대학 입학 초기에 술자리에서 선배들로부터 배운 노래이기도 하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으로 이어지는 2절 첫 가사에서는 살아있는 것조차 치욕스러웠던 당시 척박한 현실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진달래는 척박한 우리 민족 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 '남부군'에서는 산으로 몰린 빨치산들이 먹을 것이 없어 진달래를 따먹는 장면이 애처롭게 그려지기도 했다.
들머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 본 건너편 고려산 정상
능선을 향해 나 있는 오솔길은 어느새 진달래로 정겹기만하다.
진달래만큼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노란 생강나무 꽃
이 땅, 이 산하가 현대사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동안에도 봄이면 어김없이 진달래가 이 척박한 산과 들을 진분홍 빛으로 수놓았었다. 시인 신동엽 님은 전쟁의 참상 그 사이에 피어난 진달래 꽃을 이렇게 그렸다.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 신동엽, 진달래 산천(山川) -
그리고 생각난 노래 '바위 고개'.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곧잘 이 노래를 콧노래처럼 부르시곤 하셨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 납니다
고개위에 숨어서 기다리던 님
그리워 그리워 눈물납니다
바위고개 피인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즐겨 꺾어주던 꽃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임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
- 이흥렬 작사/작곡 바위 고개 -
제3봉에서 바라 본 서해 바다
그리고 혈구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진달래 능선
혈구산 정상. 불과 몇 미터 아래에는 진달래가 활짝 피었으나 약간의 고도 차이에도 정상에 가까운 붑분은 아직 봉오리인 채로 있다.
서쪽 퇴모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멀리 서해바다가 해무에 흐릿하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달래 능선
누가 심었을까, 개나리가 노란 꽃잎을 활짝 열었다.
퇴모산으로 가는 능선에서 눈에 띄인 큰개별꽃
그리고 수줍게 피어난 뫼제비꽃과
노랑제비꽃. 보통 노랑제비꽃은 산에서도 높은 지역에서 자생을 한다.
이맘 때를 꾸며 주는 조팝나무꽃
퇴모산을 향하는 능선길에서 뒤돌아 본 혈구산 정상
퇴모산 정상에서 멀리 바라 본 마니산 능선
어느새 따가워진 봄 햇살 아래의 짧은 산행이었지만 진달래에 흠뻑 취한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 소월의 '진달래 꽃'을 읊조리며 박노해의 '진달래'를 떠올렸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진달래 꽃 -
겨울을 뚫고 왔다
우리는 봄의 전위
꽃샘 추위에 얼어 떨어져도
봄날 철쭉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외로운 겨울 산천에
봄불 내 주고 시들기 위해 왔다
나 온몸으로 겨울 표적되어
오직 쓰러지기 위해 붉게 왔다
내 등뒤에 꽃피어 오는
너를 위하여
- 박노해, 진달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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