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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한국전쟁
2007. 2. 16

아버지의 한국전쟁 이야기를 어머니의 생신 모임에서 들었다. 그 동안 몇 차례에 걸쳐 단편적으로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시종일관 듣기는 처음이다.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전쟁은 어떠했을까? 궁금해하기는 했었지만, 그 당시를 산 다른 이들의 전쟁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고향 집에서 할아버지부터 삼대가 함께 살던 스물 두 살 되던 해 초여름 어느 날, 아버지는 북쪽으로부터 들려 오는 천둥 소리와 흡사한 소리들을 듣고서야 비로소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년시절을 일제 치하에서 보낸 아버지였지만 직접 전쟁을 경험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듯하다.

마을 옆으로 난 국도(2차선 비포장도로)를 따라 달구지가 섞인 피난민 행렬이 지나가고 얼마 안 되어 일단의 젊은이들과 함께 누런 색 군복을 입은 인민군 몇이 마을에 들어왔고, 함께 지내던 마을 청년 중 하나가 마을 치안 및 행정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그의 인간적 배려 때문이었는지 우리 마을에서는 단 한 사람의 피해자도 없었다.

군의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인근의 젊은이들을 군 소재지이던 대천에 불러 모아 인민군으로 참전을 독려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작스럽게 인민군 몇과 행정담당자들로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마을의 모든 젊은이가 반강제로 소집되어 포로처럼 감시를 받으며, 어딘지 알 수 없는 집결지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미 전쟁에 끌려 나가면 누구 할 것 없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던 터라서, 대열을 탈출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아버지는 밤을 새워 이십여 키로 이상을 걷고 또 걸은 후에 먼 친척이 살고 있는 어느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야음을 이용해 대열을 탈출했다. 어렴풋이 방향만을 짐작하고 무작정 산길을 걸은 후에 운이 좋게도 친척집에 이르러 끼니를 채우고는 날이 밝기 전에 뒷산으로 피했다가 낮을 보낸 후 다시 밤길을 걸어 고향집으로 돌아 오셨다 한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집 주변의 여러 토굴이나 은닉처에 숨어 지내다가 9월 하순 인민군이 후퇴하고서야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

인근 마을들에서는 그 와중에 인민군 치하에서는 친일이나 지주 등이 죄목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반민족행위자로 처단 당했고, 국군이 점령하면서부터는 또 다른 많은 이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마을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어느 장소로 끌려가서는 집단 처형되었다고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그 지역에서도 치안을 담당할 경찰을 모집했는데, 아버지도 형식적인 시험을 치르고는 경찰생활을 시작하였다. 대천의 경찰서에서 잠시 근무하던 아버지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부여경찰서로 전보발령을 받았는데, 거기에서는 빨치산 활동이 한창이던 대둔산 지역으로 파견 나가 쌍방 교전의 중심에 있었다 한다.

때로는 야음을 이용해 공격에 나선 빨치산들의 전면공세에 많은 동료들이 사망하고 주둔지까지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빨치산들은 날이 밝으면 다시 산악지역으로 철수를 했는데, 철수할 때는 그 험악한 상황에서도 전사한 동료들을 매장을 하고 떠나더라고 했다. 그렇게 생과 사가 혼재해 있는 격렬한 교전이 계속되었는데, 경찰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던지 후에 군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경비 중이던 아버지는 트럭을 몰던 군인의 운전미숙으로 다리를 크게 다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당시의 야전병원 상황이야 오죽했을까. 소독약 한 번 쓱 발라주고는 붕대만 칭칭 감아 놓은 채 차가운 바닥에 방치해 두자, 견디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고향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복귀하겠다는 요청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휴식과 치료 후에 복귀해서 근무 중이던 아버지께 어느 날 전투에 배치되면 곧 전사한다는 휴전 직전의 소위 ‘소모품 소대장’으로의 입영영장을 받았다 한다. 그리하여 몇몇 동료들과 함께 마산에 있는 군 훈련소에서 초 속성훈련을 받고는 전방 투입 대기 중 휴전이 됨으로써 아버지 일행은 전역조치 되었다 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그 후 다친 다리의 상태가 악화되어 경찰에 복무하지 못하고 고향의 조부모님과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셨다.

지금도 내가 어릴 적 이따금씩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사실에 오버랩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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